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르키예 독립전쟁 (문단 편집) === 동부전선의 상황 === [[파일:아시리아 터키.png]] 1차 대전 직후 제안된 [[흑해 그리스인]], [[아르메니아인]], [[아시리아인]] 국가 동부에서는 [[아르메니아군]]이 [[반]], [[비틀리스]] 일대를 노리고 3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여단을 동원해서 동부 국경 지대를 침공했지만 1920년 9월 24일부터 12월 2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캬즘 카라베키르가 이끄는 독립군 4개사단에 밀려서 오히려 과거 [[러시아 제국]]에 오스만 제국이 할양한 [[카르스]](Kars), [[반]](Van), [[아르다한]](Ardahan)을 다시 튀르키예에 넘겨주게 되었다. [[인종청소]] 개념의 대량학살은 이 전쟁에서 특히 동부에서 두드러지게 자행되었다. [[트라브존]], [[리제]] 일대에서는 현지 폰토스인들이 민병대나 마적단을 구성해 [[학살]]과 약탈을 벌이고 있었다. 특히 [[튀르크인]]과 [[아르메니아인]], [[그리스인]]이 섞여 거주하던 트라브존 일대에서는 폰토스 민병대가 튀르크인과 아르메니아인을 대량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당시 해외 언론인과 현지인들이 남긴 참상을 찍은 사진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. 하지만 캬즘 카라베키르의 군대는 폰토스 민병대까지 전멸시키는 데 성공했고 폰토스 민병대가 사라지자 폰토스인들이 눈이 뒤집힌 튀르크인과 아르메니아인에 의해 대량으로 보복 학살을 당하는 일도 발생했다.[* 트라브존은 본래 [[동로마 제국]] 시절부터 그리스계 폰토스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[[16세기]]경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이 동쪽에서부터 이주해 상업 세력을 형성했고 폰토스인과 경쟁하고 있었다. 특히 [[밀레트 제도]]로 인해 종교 중심의 공동체사회였던 오스만 제국에서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은 같은 기독교인이었지만 종파가 달랐고 상업에 있어 서로 경쟁하는 상대였기 때문에 서로 적대적이었다. 이 와중에 폰토스인들이 깽판까지 쳐놔서 아르메니아인들도 튀르크인에게 협조해 폰토스인에 대한 보복 학살을 했다.] [[1921년]]에는 이미 서부전선을 제외한 다른 전선들은 소강상태에 들어간 상태였다. 하지만 그리스군은 대국민의회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상대였으며 아나톨리아 내부에 거주하던 [[그리스인]]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[* 이로 인하여 튀르크인들은 그리스인들은 적이라고 선포하고 나중에 오스만군이 아나톨리아 내부를 탈환하자 미처 달아나지 못한 그리스인들은 마구잡이로 학살당했다. 누레딘 이브라힘이 내린 명령으로 어림잡아도 20만에서 그리스가 주장하기론 90만 가까이 학살당했다. 하지만 이전에 이 그리스인들은 그리스군의 비호 아래 검은 운명 부대가 점령지역에서 튀르크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던 일에 협조했다. 30~40만에 이르는 튀르크인들과 30만 이상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당했기 때문에 [[아르메니아인 대학살]] 항목에서도 그리스도 오스만 제국과 같은 가해자로서 언급되었다. 덕분에 그리스는 아르메니아 학살을 비난하다가 튀르키예에게 너네가 저지른 학살은 뭐냐며 비웃음당하기 일쑤다.]에 협상국의 장비까지 지원받아 막강해진 그리스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